-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았던 임기응변의 달인
- 중국으로 진출한 진주 ‘소’ 씨
- '확장성'과 '변형성'을 가진 무대, 관객 참여가 핵심
- 이벤트人의 자기규정 중요... ‘아티잔(Artisan_장인)’, ‘해피메이커’
- ‘뇌이벤트’ 등 기술이 예술문화를 선도하는 그 날까지...
‘세상에 니은(ㄴ)자로 서 있는 명함이라니...’
마치 무대와 같은 모양, 접히지도 않는 입체명함 위에 '미라클'이라는 사명이 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예사롭지 않은 이 명함을 웃으며 내민 분은 특수효과 및 기계장치 분야의 전문가 '소달영' 대표. 그는 1988년 서울 올림픽 개폐막식에 참여한 이후 이벤트 산업의 구성원이 되었고 이후 많은 우여곡절 속에 특유의 임기응변을 바탕으로 국내는 물론 중국에 진출하여 중국 중앙방송국, 상해 방송국의 협력업체로 일하기도 했으며, 2008년 북경올림픽 개폐막식에 외국 업체로 참여하여 조직위원회 표창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또 그는 사단법인 '한국방송문화산업기술인협회'의 회장이기도 하다.
길을 다니면서도 사소한 무엇을 보아도 특수효과 방향의 시선으로 접근하면 새로운 아이템이 보이게 되며, 예기치 못한 전문기술들의 ‘합쳐짐’이 바로 특수효과의 매력이라고 한 그는 ‘장인(Artisan)’의 방대한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이벤트넷 사무실에서 시작한 인터뷰는 근처 식당으로 장장 3시간 동안 이어졌지만 ‘해피메이커’답게, 시종일관 '스페셜 이펙트’가 그의 입에서 임팩트 있게 터져주어 지루할 틈이 없었다.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았던 임기응변의 달인“
Q. 어떻게 특수효과 일을 시작하게 되었나?
“시작은 '인형극'이었다. '세계 인형극대회'가 시발이었고, KBS1TV의 'TV유치원 하나둘셋'을 처음 만든 인형극의 대부인 조영수 씨가 MBC인형극의 김선익 대표를 소개시켜줘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뽀뽀뽀' 계약직으로 AD(Assistant Director)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당시 '애니메이션'은 기술력이 약했고 이를 대신할 수 있는 건 '인형극'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인형극은 '표현력'이 약했기에 이런 '리얼함'의 문제를 좀 해결해보고자 일본 'NHK TV'의 '도꼬'라는 특수효과 회사에 가서 기술접촉을 시도하였다. 그래서 처음으로 가져오게 된 것이 '거미줄'이었다.”
“한 편 그 당시 특수효과는 영화에만 있었는데, 문제는 '페이크'가 없다는 것이었다. 폭파장면과 총격장면에는 각각 실제 다이너마이트와 실제 총을 사용하였기에 배우들이 많이들 다쳤다고 한다. 효과를 충분히 살리면서도 좀 덜 위험한 소품이 필요했다. 이런 것들을 해결하는 역할을 내가 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영화, 방송, 예능 등에서도 특수효과가 사용되게 되었다.”
“또 당시 TV, 특히 어린이 프로그램에서는 '도사'가 등장하는 장면이 많았는데 그들이 등장할 때는 연기와 함께 '뿅'하고 등장하는 것이 정석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때 사용되는 일명 '뽕 화약'은 마그네슘이 주성분이라 열이 많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 때 암모니아를 배합하는 기술로 열을 낮출 수 있었고 '도사님'은 리얼하면서도 보다 안전하게 등장할 수 있었다.”
“이후 1986년 일본 인형극회에서 일하게 되었고, 이들에게 내가 미국의 유명특수효과 회사에서 벤치마킹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으나 그것이 여의치 않자 퇴직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88년 올림픽 때 호돌이 마스코트 400개를 직접 운영한 것이 내가 특수효과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1개당 50만원 쯤 받았으니 합이 2억쯤 되었을 것이다. 이 때 기술이 마땅찮아 월트디즈니의 협조를 구했는데 이것 때문에 롯데월드 캐릭터 팀이 생겨나기도 했다.”
Q. 기억에 남는 행사나 활약이 있는가?
“1990년에 '삼성 한마음 체전'이 기억에 남는다. 이는 삼성의 이건희 회장 취임 이후 대내외에 그 정신을 밝히는 행사였는데 당시 비공식적으로 몇 백억 규모의 행사였다. 당시 '특수효과'라는 말 자체가 없었고 그 전에는 '특기', 즉 '특별한 기술'이라고 불렀다. 이 행사가 특수효과의 시초인 셈이다. 이 때 이미 산업규모가 컸던 영화에는 특수효과가 존재했다. 이는 해방 이전에 상해 등에서 중국 사람들에게 영화를 배웠었기 때문. 중국이 먼저고 나중에 일본에서 별도로 영화 기술이 도입된 것이다.”
“초기 특수효과는 '소품'과 연결되어 있었다. 방송에서 시청자들의 호응을 자아내는 박수부대들이 존재하였는데, 이를 대체하기 위해 '짝짝이' 라는 일종의 박수로봇을 고안해 이벤트 도구로써 사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장치연화'라는 디스플레이 화약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한국화약'에 제공하여, 기존의 '타상연화'처럼 '뻥뻥' 터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분수불꽃과 같이 '예쁘게 터지는' 연출도 가능케 하였다.”
Q. '정점'을 꼽는다면?
“이벤트 업 자체의 시작과도 관련이 깊은 1993년 '대전 엑스포'가 그것이다. 이때는 비교 대상이 없었기에 기준 단가가 없었고, 선진기술이 많이 도입된 것으로 기억한다. 방송에서는 90년대 초 '토토즐(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과 '쇼특급'이라는 프로그램이 서로 경쟁적으로 특수효과를 도입하던 것이 인상 깊다. 한 쪽에서 20발을 쏘면 한 쪽에선 40발을 쏘고 또 한 쪽에선 60발을 쏘는 식. 망하든 말든 막 사용했다. 또 예능 프로 출연자들의 구성이 다양해지고 무대의 볼륨도 커져갔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멀티플렉스 무대. 한쪽에서 2층짜리 무대를 세우면 다른 쪽에선 3층짜리를 세우는 식으로 서로 경쟁이 붙었다.”
“중국으로 진출한 진주 ‘소’ 씨”
Q. 중국과는 어떻게 연을 맺고 그곳으로 진출하게 되었나?
“앞서 얘기한 '토토즐'이 프로그램 볼륨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700년의 약속'이라는 세부 프로그램을 기획하여 외국진출을 꾀했다. 700년 전 신안 앞바다에서 배와 함께 가라앉은 보물을 찾는 프로그램이었다. 중국 복건성에서 출항식을 하고 신안 앞바다에서 재를 지낸 후 일본 후쿠호카에서 환영대회를 하는 식. 복건성에서 발전차가 없어서 경운기로 대신하고 선을 연결하는 커넥터가 없어 그냥 천으로 감아놓는 등 고생이 많았다.
내가 '소'씨라서 소정방의 후예란 소리를 많이 들었다. 실제론 진주 소씨 인데 그래서 그런지 중국에 대한 어렴풋한 동경이 있어왔다. 당시 중국은 선동선도를 목적으로 한 방송은 잘하지만 기술력이 약했기에, 도와줘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배우려고 갔는데 일은 가르칠 생각 없이 청소만 시켰던 일본에서의 '수모'도 한 몫 했던 것 같다.”
“이 후 1997년, ‘상해TV’의 부사장과 함께 '상해 아트비젼'을 만들었다. 투자한 것만 몇 억쯤 됐는데 당시 중국 돈으론 몇 백억쯤. 진행되는 모든 방송의 무대, 음향, 조명 등을 도맡는 조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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