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아시안게임에 바란다
김정로
2014 인천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는 지난 6월 임권택 영화감독을 개폐회식의 행사총감독으로 선임 위촉하였다. 우리의 문화예술역량 과시와 개폐회식의 성공적 수행을 위해 각계의 의견과 추천을 종합 검토하여 임감독을 적임자로 선정하였고 당사자는 77세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락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에 필자는 88올림픽 개폐회식을 수행해본 사람으로서, 그리고 이후 현재까지 필드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문가의 한 사람으로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조직위에 당부 드리고자 한다.
첫째. 임감독님이 소신껏 일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드려야 한다. 전대미문의 창의적 아이디어와 새로운 시도는 모험이자 실험에서 출발한다. 행정의 틀에서, 감사의 기준으로 보면 불가능할 수도 있겠으나 시행착오를 인정하지 못하고, 아이디어의 지적 가치가 간과되고, 숙성되지 않은 기준으로 입찰을 해야 하고, 가격의 관점에서만 발주된다면, 사후에 회자될만한 기념비적 역작은 구현되기가 힘들 것이다. 전적인 신뢰를 기본으로 인내하고 기다리며, 유연하고 탄력적인 돈과 사람의 운용 시스템이 작동될 때 위대한 탄생이 예고될 수 있다.
둘째, 영화감독이 개폐회식을 연출하는 사례들이 있다.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뜻대로 행해도 어긋남이 없는 도통한 노대가를 폄하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한번도 대형 그라운드에서 펼쳐지는 라이브 퍼포먼스 이벤트를 해본 경험이 없으신 분이다. 그러면 휘하에 속칭 선수들이 붙어주어야 한다.
장이머우(張藝謨) 감독은 이미 주빈메타와 오페라 투란도트, 뉴욕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세계 초연, 대규모 야외 실경 이벤트인 7편의 인상시리즈 등 15년간의 공연제작 경험이 바탕이 되어 베이징 올림픽 개폐회식의 총감독이 되었다. 런던올림픽의 대니보일(Daniel Boyle)감독도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자이기도 하지만 원래 연극에서 출발하여 왕립 셰익스피어 극단에서도 수 차례 연출을 하였던 공연전문가인 것이다.
생활에도 달인이 있는 것처럼 영화는 영화감독이 잘 만들고, 방송은 PD가 제작 잘 한다고 가정해보면 매체의 특성이 전혀 다른 이벤트 분야는 이벤트PD가 제일 잘 만든다고 귀결될 수 있다. 그들이 발탁, 기용되어 도와드려야 한다. 전국체전, 월드컵, G-20, APEC, 귀빈행사, 지역축제, 모터쇼, 신제품발표회, 전시, 컨벤션, 콘서트 등 여러 경제주체의 다양한 이벤트를 이 시간에도 기획하고 수행하고 있는 주역은 그들이다. K-리그를 무시하고 월드컵의 선전을 기대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장예모 감독의 실무 협력스태프인 왕차오거(王潮歌)와 판유에(樊跃)는 영화감독도 PD도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개폐회식 실무연출지휘를 또 장진 영화감독에게 맡겼다는 사실은 메가 이벤트 제작의 생리를 외면하는 패착 또는 악수라고 할 수 있다. 장감독은 재주도 많고 공연을 해본 경험도 많다. 하지만 수천명의 출연자 및 스태프를 다룰 실무연출지휘와는 스케일이 다르다.
셋째로, 임감독님은 취임일성으로 “그 동안의 여타대회에서 보여주었던 물량과시나 화려함이 아닌 감동과 배려를 통해 40억 아시아인이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스토리를 보여줄 예정”이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물량과시를 하지 않고, 화려하지 않게 보이는 것이 훨씬 더 어렵고 돈도 꽤 든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세련되어야 하고 때깔을 연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백의 미를 살린다는 것은 그냥 비워놓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스타디움은 400m 트랙이지만 외경 둘레는 1Km가 넘는다. 1m당 조명기 한대씩만 배치해도 1000대가 필요하고, 최소 300Kw의 전기가 필요하며, 2Km가 넘는 케이블이 필요하다. 출연자 2천명이 5천원짜리 도시락 100일 먹는다면 오로지 연습식대만 10억원이다. 스타디움은 세트장 또는 방송국 스튜디오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조직위는 대가를 모셨으면 그에 걸맞은 규모의 예산을 배정 지원해드려야 한다. 괜히 노인네 모셔놓고 사람꼴 안되고 그분 평생의 위업에 금이 가게 해서는 안 된다.
모든 객석을 만족시켜야 하는 원형경기장에서 이루어지는 아시안게임 개폐회식은 범 아시아인의 글로벌 잔치로 승화시켜야 하는 축제성, 성화점화/대회기게양/선수단입장/개회선언 등 식순을 이어가는 공식성, 2014년 인천에서 거행된다는 시공간의 기념성, 개최국의 문화역량을 보여주는 예술성, 매스감있는 스펙타클을 보여주어야 하는 경관성, 한국의 디지털기술이나 IT를 접목하여 상상을 구현시키는 첨단성, 재미와 즐거움이 있어야 하는 오락성, 그리고 깜짝쇼 등의 의외성과 같은 제반 요소들이 서로 조화롭게 융합되어야 성공할 수 있음은 감독님도 이미 알고 계실 것이다.
마지막으로, 쇼를 위해서 본질이 전도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스포츠 정신에 입각한 아시안게임의 주인은 역시 각국에서 참가한 선수들이다. 그들이 대접받아야 하고 그들이 주연이 되어야 한다. 공연 잘하자고, 시청률 높이자고 경기장을 벗어나 선수는 엑스트라가 되어 일산호수공원 세트무대에서 행해졌던 작년 92회 고양전국체전과 같은 일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
왜곡된 문화역량의 과시는 공허함을 낳을 수 있다. IOC와 OCA의 공식식순을 기반으로 매스 퍼포먼스가 입체적으로 가미된 소리로, 빛으로, 영상으로, 디자인으로, 안무로, 의상소품으로, 특수효과로 우리 것과 보편성이 잘 조화되고 승화된 개폐회식을 펼쳐 보인다면 그것이 스포츠대회에 적합한 이벤트라고 생각한다. 개최지를 돌아가면서 하는 전 아시아인의 스포츠 축제가 2014년에는 인천이라는 장소에서 열리는 것뿐이다. 지난 런던올림픽 개회식을 보면 영국은 있었는데 올림픽은 없었다. 속이 허한 영국이 안타까웠다……
※ 기고자 김정로는 서울올림픽대회조직위 개폐회식 특수효과담당관으로 근무하면서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 88장애자올림픽을 수행하였으며, 사단법인 한국이벤트프로모션협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 디지털연출법인 디지큐㈜의 창업자이자 회장이며, 동국대학교 등에 출강하고 있다. 아울러 2007년 미국 텍사스대(The University of Texas at Austin)에서 공연기술(Theatre Technology) 분야 MFA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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